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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만 25년 살아온 나는, 첫번째 대입에 실패한 후 재수의 길을 걷는다.

비록, 원하는 서울 명문대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대학교 총학생회장을 거치며,

자신감과 거만함 허세에 가득 찬 20대를 보내던 중이었다.

총학생회장의 임기를 마치고, 4학년 1학기로 복학한 나는, 동기들과 친구들이 같은

레벨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심하게 느껴졌으며, 나보다 아래로 느껴졌다.

이 세상 자체가 우스워 보였고 쉬워보였다. 그에 따라 돈 씀씀이도 무지막지하게

커져 버려서, 전액장학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자금 대출을 하는 아이러니 상황이 벌어져 버렸다. 그때, 어느순간, 아차싶었다. ‘이렇게 살다간 큰일나겠다. 이건 내가 아니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싶다. 친구들과 재밌게 지내고 소소함에 감사할 줄 아는 나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결책이 필요했던 나는, 아무도 없는,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홀로 떠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6개월간 호주에 가기로. 대신 최소한의 돈을 가지고가서, 처음부터 시작해보기로, 몸으로 부딪혀 고생하면서 나의 오만함과 허세를 지우고 싶었다.

당장 시작했다. 별도의 준비라 할 것도 없이, 휴학을 한 후,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했다. 다행히 우리나라 청년들이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가는 것에 대해서 많은 제약이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선진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당시 통장에 잔고도 없던터라, 어머니에게 150만원을 빌려서, 비자를 신청하고, 비행기도 최저가 경유 항공, 그리고 2주의 숙소를 시드니에 예약한 후 떠나왔다.

그 당시 2011년에는 유튜브 및 블로그가 활성화 되지않은 시절이었고, 정보를 많이 얻을 곳이 없었다. 심지어 카카오톡의 보이스톡도 없던 시절이었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숙소에 미리예약을했고, 은행계좌, 핸드폰 개설, 일용직을 구해주는 등의 도움을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호주의 환율은 1달러당 1280원을 육박하는 중이었고, 전재산을 환전해간 나는 500불정도만 수중에 있을 뿐이었다.

2주후에는 당장 1주에 150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방세를 내야했고, 이를 위해서는 관광이고, 맛있는 음식이고 생각할 겨를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영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시드니에서 활성화되어있는 한국인 교민사이트인 호주나라, 혹은 집에거주했던 한국인 형들의 도움(당시 집주인 형들은 유학원을 운영중이었음)을 받아 닥치는대로 일용직을 시작했다. 한인마트, 물류공장, 공사장 잡일, 세차장 등

주어지는 일은 무조건 했다.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일당 100불 이거나, 시급 10불이었다. 당시 호주의 최저시급이 얼마인지 알지도 못했다(15.5불이 최저). 그만큼 정보가 없었으며,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총 6명이 살았는데 남자4 여자2 이었다. 유학원을 운영하는 형들이 렌트를해서 게스트하우스 식으로 운영하는집이라 저녁마다 한국인 지인들이 많이 왔고, 2~3일에 한번은 소주를 마시게되었다. 한병에 만원이 넘는소주를.

심지어, 그곳 시드니의 스트라스필드는 한국인이 모여사는 지역이었고, 상점의 30%이상이 한국어로 된 간판이었다. 일용직을 할 때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주머니께서는 그곳에 20년을 거주했지만 영어한마디 할 줄 모른다고 하셨다.

아차 싶었다. 이럴거면, 이곳에 와있을 이유가없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 한국과 다를게 뭔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당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3가지 중에 하나였다. , 영어, 여행. 나는 셋다 관심있지 않았다.

나의 목적은 나를 다스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한국인들과 소주마시면서 한국인상점에서 일하고 있는 내자신이 엄청 한심하게 느껴졌고, 그날저녁 호주나라를 통해 어떤 한 청소사장님과 연락이 되어 시드니에서 차로 4시간 정도걸리는 남쪽에 있는 노우라(Nowra) 라는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단둘이. 설명도 자세히 듣지 못한 채.

그곳은 관광지로써, 사람들이 굉장히 북적이는 곳이었는데,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할 일은 대형 마트 2개를 청소하는 것이었다. 울워스라는 마트를 12:00부터 18:00까지 청소한 후

새벽 02:00~06:00까지 바이로라는 마트를 청소하는 주 7일잡이었다. 시급은 캐쉬로 10불이라고 했으며, 하루 10시간씩 주 7일이니, 계산상으로 700불이었다.

그 한국인 사장은, 숙소라는 작은빌라와 1992년식의 아주 구형 포드를 나에게 제공해주고 가버렸다.

나의 할 일은 낮시간의 마트에서는 바닥이 더러운 곳이나 화장실을 수시로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쉬는시간 15분을 제외하고는 앉아서도 안되었다. 6시에퇴근한후 차로 20분거리의 숙소로 이동해 잠을 청한 후 새벽1시에 일어나 40분거리의 또다른 마트로 이동하여 아무도 없는 새벽에 마트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숙소에 7시에 복귀해 쪽잠을 청한 후 다시 출근.

지금생각해보면 살인적인 스케쥴이었다. 외로웠다. 마트에 출근한지 3일째 되는 날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How’s going? 나는 무슨말인지 몰랐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를 가냐는 것인가? 어떻게 가냐는 것인가? 대체 무슨말이지? 그러고는 대답했다. By my car라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가버렸다. 다음날 그의 동료로 보이는 직원이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고, 어제 질문이 틀렸다고 생각한 난 at home 이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나는 속히 말하는 왕따가 되었다. 그리고 쉬는시간 15분동안 엎드려서 자다가 매니져에게 불려가기 일수였다. 일 한지 한달쯤 되던 날. 나는 이 생활이 너무 서러웠다. 울었다. 친구 10여명에게 전화했다. 차마 부모님께 전화할 수는 없었다. 나 혼자만의 다수결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그중 6명이 버텨라, 4명이 돌아오라고 했다. 버텨보기로 했다.

영어공부를 했다. 내가 사용해야 될 문장들을 집에돌아오면 번역해보고 외웠다.

그때 그 문장을 사용하지 못하면 죽을 거 같았기에, 목숨걸고 외웠고, 사용했다.

한국에서 받은 10년동안의 영어 정기교육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내가 공부한 문장을 파란눈 노란머리의 사람들이 알아들었을때의 희열을 잊을수가없다.

두달 넘게 일할즈음 나는 몸이 망가져가는 것을 느꼈고, 일을 그만두려하였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는 새벽마트 청소 출근중에 키가2미터 정도되는 캥거루를 쳤는데, 차의 왼쪽 본닛 부분이 박살이났다. 다행히 나는 다치지 않았다.

호주에서의 로드킬은 굉장히 흔한일이다. 로드킬 후 지나가면 법적으로 아무런문제가 되지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로드킬을 했다고 신고하면 벌금을 700불정도 내야한다고 들었다.

당시 두 달 동안 12Kg정도가 빠졌다. 그래도 돈쓸시간이 없었기에, 통장엔 2500불정도의 잔고가 채워졌으며, 다른곳으로 이동하기에는 충분한 자금이었다.

마침 그당시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온 대학교 후배가 호주로 넘어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후배는 브리즈번으로 농장일을 가고싶어했고, 나도 그 후배와 같이 이동하기로하였다. 우리가 이동하려는 지역은 스텐소프(Stanthorpe)라는 지역으로 브리즈번에서 차로 3시간30분 거리에있었다.

이곳으로 결정한 이유는, 그당시 유일하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사무실을 정부에서 운영하는곳이었고, 다른 농장지역들은 개인적으로 컨텍하거나, 백팩커에 살아야 일자리를 잡아주거나, 악덕 컨츄렉터 밑에서 일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반년만에 마음다잡고 돌아가리라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나는 스텐소프에 14개월 정도를 머물렀다. 어느농장을 가도 말없이 빨리빨리 일하는 나는 인정받게되었고, 시급 19.8불을 받으며 돈도 넉넉하게 벌수있었다. 그곳에 소수의 한국인 커뮤니티가 결성되었는데, 한국인들은 일을잘한다는 인식을 이 지역에 퍼졌기에, 우리한국인 모두는 각각의 농장에서 두곽을 나타냈고, 그 지역의 터줏대감이 되었으며, 주말마다 파티를 하며 정말 즐겁게 생활했다.

농장일은 보통 새벽5~6시에 시작하여 2~3시 정도면 마쳤으므로, 남는시간에 운동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사업기질도 발휘하여 집을 2개 렌트하여 커뮤니티가 부족한 아시아 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여 더불어 금전적인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의 복학을 위해 110개월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변의 권유를 받아 돌아오자마자 토익시험을 치뤘다. 하지만, 주변에 차마 시험봤다고 말할수 없는 점수인 505점을 받았다.

LC 400RC 105. 원래 영어에 소질이 없었던 난, 영어귀가 뚫렸다며 자기위안삼았다. 2학기를 마친 나는 내 미래가 막연했고, 하고싶은게 무얼까 몇일 몇날은 고민하고 검색해본 끝에, 3D프린터에 엄청난 흥미가 생겼고, 호주에서 생존을 위해 배우기된 영어를 바탕으로Stratasys라는 세계1위 외국계3D프린터  파트너회사에 직접 이력서를 찾아들고가서 면접을 보게되었다.

경영학과를 전공한 난 기술영업파트로 지원으며 정식 면접 절차를 거치게 되었고, 직접 찾아온 돌연변이 같은 녀석을 반신반의하며 기술영업파트가 아닌 CS, 즉 엔지니어로써 시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회사에서 한국의 사회생활을 배우며 재밌고, 즐겁게 성장해나갔으며 2년반의 엔지니어 생활을 하며 대리까지 진급할수 있었다. 하지만, 30세가 되어가던 나는 한번 더 큰 세상을 보고싶다는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몇몇 나라를 제외한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은 워킹홀리데이국가들의 신청자격은 대부분 나이제한이 만30세였으므로, 그 중 영어권 국가이고 선진국인 청정지역 뉴질랜드를 나의 타켓으로 삼게된다.

호주와 생활환경이 비슷할것임이 분명하기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멋진 삶을 살 자신이 있었기때문이다. 마침 2016년에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인원 제한이 1800명에서 3000명으로 늘게되어 나의 결심도 한결 수월했다.

그렇게 비자를 성공적으로 받고 난 후, 회사에서 퇴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게되었다. 뉴질랜드 생활의 시작은 어학원에서 하고싶었다. 내가 호주에 있을때, 어학원들 거쳐서온친구들과 나처럼 무작정 떠나온 친구들과는 처음 생활에서부터 차이가있었다. 그만큼 외국인과의 언어소통을 해봤다는 경험과 배웠다는 것은 앞으로의 결정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눈으로 봐왔기때문이다.

3개월의 어학원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으며,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문화를 배울수있고 외국인 친구들도 사귈수 있었기에 정말 재밌었다. 이 시기에 나는 뉴질랜드에도 Stratasys 3D프린터를 판매, 관리하는 회사가 한군데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는데, 홈페이지 및 본사를 통해 그곳의 이메일에 나에대한 소개 메일을 보냈었다. 혹시나 이곳에서 회사를 다닌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항상 마음속에 한살이라도 더 젊을 때 무모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지고있었기에, 부딪히는건 언제나 어렵지만 즐거웠다.

하지만, 그곳에선 전혀 연락이없었고, 어학원을 마치고, 흥미가 가는일들을 지역을 이동해가며 하게되었다. 달러샵, 피시앤칩스 가게 등,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할경험 그리고 영어를 많이 쓸수있는 환경을 공략하였다. 다시한번 느꼈지만, 영어가 많이 늘기위해서는 내가 일한는곳의 네이티브손님이 많은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나 친구들이 네이티브여야한다는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하고 많은 손님을 영어로 상대한다고 해봤자 어차피 사용하는건 같은 맥락의 문장이고 대화이다. 예를들면, 인사(How are you?), 어떻게 도와도와드릴까요?(May I help you?) 주문하시겠어요?(Would you like to order?) 감사합니다. 등 같은 패턴의 영어만 사용하게 된다. 물론 손님과의 스몰토크도 간혹있겠지만, 실행활의 영어를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과 여행을 반복하며 진정한 워킹+홀리데이의 생활을 즐기고 있던나는 다시 한번더 인생의 기로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3D프린터 회사에서 연락이온것이다! 이때가 뉴질랜드 워홀 10개월에 접어들때였는데, 본사를 통해서 뉴질랜드의 RICOH라는 대기업에서 파트너권을 새로 인수하게되어 엔지니어가 필요한데 면접의 기회를 주겠다는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몇날 몇일을 새가며, 면접준비 및 외국 회사 환경에 대해 공부했고, 3번의 면접끝에 합격하게되었고, 좋은조건에 입사가 확정되었다.

뉴질랜드에서만 1000여명의 직원이있는 이곳에 유일하게 한국인이 나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약간은 초조했다. 왜냐하면, 조언을 구할사람이 전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부서는 회사입장에서는 새로 런칭한 부서라서 회사생활을 일일이 알려줄 매니져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처음 입사하게되면, 멘토가 한명 붙어서 회사의 전반적인 소개와 분위기들을 일러주며,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적응할 때까지 많은 것을 도와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본인이 물어물어 찾아먹어야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우리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않아, 입사 후 다른부서의 직원 및 임원급 간부들과의 미팅을 밥먹듯이했다. 그래도 나는 영어는 할줄안다고 스스로 자부했던지라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나의 자신감은 점점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바뀌어갔다. 전문적인 비즈니스 영어에는 배려가 없었다.

, 뭔가 잘못됐구나라고 깨닫게 된 순간 나는 벙어리가 되어있었고, 3개월간 듣는데에 온신경을 집중한 저는 집에오면 녹초가 되어 뻗어버리기 일상이었고, 평소에 없던 두통까지 찾아왔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일할 수 있는게 얼마나 행복한건지 새삼 느끼게 되면서 말이다.

어느 날 매니져와 이야기 할 기회가 있어서, 나의 언어에 관한 고충을 털어놓았더니

그는 저에게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1년정도 지나면 문제없을거라고 조언해주었다. 길지 않았던 그 말이 나에겐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고, 나를 지켜보고 기다려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회사의 근무환경은 한국의 그 어떤 회사와도 비교할수 없었다. 첫째로, 그 누구도 나에게 일에관한 압박을 주거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둘째로,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야근을 하고싶어서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 회사의 경우 7~8시가 출근시간이었으며, 7시에 출근하면 330분 퇴근, 8시에 출근하면 430분 퇴근하면 되었다. 하루는 일이 조금 남아서 510분정도까지 남아있던적이있었는데, 회사 문 다 잠글꺼니까 나가라고 했다. 내일하라고,

셋째로, 일처리를 여유롭고 정확하게 한다. 한국처럼 빨리빨리가 아니라, 천천히 정확하게 한다. 그 누구도 신속하게는 하지만 급하지 않다. 사람들 모두가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는 문화 덕분인것이다.

넷째로, 복지가 좋다. 본인의 포지션과 할당된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휴가도 1년에 20일 그리고, 병가 5일을 주는데 본인이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회사에 1년즈음 적응해갈무렵, 나에게 또다른 큰변화가 있었으니, 회사에서 Stratasys의 파트너권을 포기한것이다. 영업이익이 생각보다 낮았기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고객들이 있었기 때문에, 호주의 파트너가 이것을 인수하길 원했고, 그 곳에서는 나와 함께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현재는 뉴질랜드 유일의 Stratasys 3D Printer Technical Service Engineer 로써 근무중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에 한국에 3주간 갈 날을 기다리고있다. 이곳은 크리스마스기간에 모든 회사가 2~3주간 문을 닫고 쉬는 셧다운 기간이 있기때문이다.

 워킹홀리데이는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20대의 오만한 나는 더 이상 없다.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찬 30대를 보내고있는 내가 있을 뿐이다.

한국인인 것에 감사한다. 한국인이기에 워킹홀리데이의 기회를 쉽게 부여받을수 있었으며, 한국인이기에, 외국에서 가서도 편견없이 우대받으며 일 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나의 나이가 더 어렸더라면, 아니, 워킹홀리데이에 나이제한이 없다면, 캐나다, 아일랜드, 영국등 다른나라에 또 도전해보고싶다. 언젠간, 내가 겪은 이 경험들과 선진 문화들을 꼭 우리나라에 돌아가 전수하고 적용시키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은건, 현재 삶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도전하라고 말해주고싶다.